태권도역사

기원

태권도의 발생

인간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신체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운동을 제거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은 그 활동을 통해서 성장·발달한다.
이러한 신체 활동은 옛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무기가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 사회에 있어서는 각자의 생활 영위와 종족 보존을 위한 식물의 획득, 외적방어라는 인간 본능의 생활요구에 따라 자연 발생적으로 도수공원(徒手空援)의 투쟁형태가 투기 또는 자위무술로 발달하여 그 시대의 유일한 체육적 활동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자신의 육체적 힘만으로는 동물보다 우세할 수 없음을 알고 명석한 두뇌로 무기를 발명하고 단체의 힘이 개인의 힘보다 우세함을 알아서 집단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기 사용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튼튼히 하려는 생존의식은 계속 되었고, 체력과 기술을 발휘하고자 하는 인간 본능이 앞서서 개발된 투기나 자위무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이 시대에는 농업을 위주로 하던 농경시대였으므로 천신, 태양, 산악 등을 숭상하는 원시 신 앙, 인간신앙이 유일한 생활이니만큼 오월 하종(下種), 시월 추수(秋收)가 끝나면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부족에 따라 부여에서는 동맹, 마한에서는 시월제, 신라에서는 가배라 불렀으나 같은 성질의 제례였으며 이때 힘과 기술을 겨루는 투기시합을 하였다하니 지금까지 전하는 농악, 씨름 등 민속놀이에서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제 천 대회에서 여흥적으로 즐기던 유희, 오락과 투기 등이 점차 경쟁의식을 갖게 되어 경기로 발전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 없다. 이러한 것은 다신교를 신봉하는 그리스인들이 여러 신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전에서 제전경기를 행한 올림피 아 경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부락의 단위가 확대됨에 따라 구방능력과 전투기능의 향상을 목표로 강한 정신력과 체력 배양을 위한 무예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따라 제천대회의 체육활동 역시 투기를 중심으로 한 무술 경기를 중요시 하였다. 이에 따라 전 부족민이 무예수련을 생활로 삼았으며, 대회에 참석한 무사들은 그들의 기를 다루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또한, 부락의 단위가 확대됨에 따라 구방능력과 전투기능의 향상을 목표로 강한 정신력과 체력 배양을 위한 무예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따라 제천대회의 체육활동 역시 투기를 중심으로 한 무술 경기를 중요시 하였다. 이에 따라 전 부족민이 무예수련을 생활로 삼았으며, 대회에 참석한 무사들은 그들의 기를 다루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제천행사가 계속됨에 따라 신체 건강을 위한 양생술이 발전되었고 동작이나 힘이 우세한 동물의 공·방자세 등을 자신들의 투쟁경험을 위주로 체계화 시켰으니 여기서 오늘날의 태권도가 싹트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태권도는 발생 후 택견, 턱걸이, 백견이, 수박, 태껸, 탁견 등으로 불리워오다 태권도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내적으로 세력 확장을 위한 영토 분쟁과 민족 통일을 위한 무술을 중심으로 한 체육활동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의 시조가 모두 무인이며 또 삼국사기 열전의 인사가 87명인데 그 중 무인이 60명인 것을 보아도 나라의 주인이 무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시대적 환경이 무예체육의 실행을 촉진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도 같은 동서고금에 빛나는 무인 청년단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이 시기의 무인들은 검술이나 다른 무술의 기초수련으로서 태권도를 행하였음을 고찰할 수 있는데, 해동죽기에 ‘검술(劒術)은 수술의 묘로부터 나온다.’라고 기술하고 있음은 수술이 검술의 기본이라는 증거의 하나이며, 무예가로서 정평이 나 있는 武藝圖譜通志(무예도보통지)에 의하면 ‘태권(권법)’은 손발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사지와 몸의 활용법을 연마시켜줌으로써 무예의 초보로 태권을 실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무인들은 일찍이 부족국가 시대부터 무예의 기본이나 무술의 하나로 태권을 행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대 부족국가시대에는 부락의 부족들이 지위상 군장을 맹주로 삼아 그 족장에 복종하는 마음과 아울러 동기상부하는 사상 에 기인한 자치관념이 점차 발전하여 사회윤리의 근원이 되고 문화 발달을 촉진한 무사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전개한 바와 같이 시대적 환경이 무예를 중시한 관계로 무예를 수련하는 무사단의 창설을 촉진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고구려의 선배와 신라의 화랑이었으며 이들의 심신 단련과 무예 수련의 방법으로 태권도가 행해졌다고 추측된다.

고대

고구려의 선배와 택견

고구려는 원래 주위 적과의 투쟁과정에서 성장·발전한 관계로 신라나 백제보다 기력이 있고 호전적인 국민이었다. 고구려는 초기에 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2세기경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2대에 걸쳐 ‘선배’라는 강력한 무사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국가의 강성과 중앙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창설된 것으로 풀이된다. ‘선배’가 된 자는 각각 무리를 지어 한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 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講習)하거나 일신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사양치 않았다.

고구려 당시에는 각종 지위가 출신에 의한 세습제였으나 오직 ‘선배’만은 출신성분과 관계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까닭에 인물된 사람이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이로써 고구려에서는 문과 대등한 무의 위치를 엿 볼 수 있고, 오히려 무예를 중요시하는 진취적인 상무정신이 더욱 두드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무(武)를 중시한 고구려에서 무예의 근간인 택견이 으뜸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

신라의 화랑과 택견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신라는 건국초기에는 외적의 침입이 없어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으나 백제의 건국, 고구려의 침입 등 세력팽창과 영토확장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무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신라의 무예라면 먼저 수련 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제도를 모방하여 당 12년에 이르러 풍류도, 풍월도란 민간청년단체를 재정비·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화랑도는 무사도의 용맹과 충(忠), 효(孝)를 기초로 국가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이 강하였으며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삼아 인격도야와 심신단련에 힘써 국가를 이어 갈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삼국통일에 기 여한 김유신, 김춘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상고사에 기록된바에 의하면 “국선화랑은 진흥대왕이 곧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닮아온 것이며 시수두 단전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에 힘쓰며 수박(手搏), 격검(擊劍), 기마(綺馬), 덕 견이, 깨금질, 씨름등 각종 경기를 하여 원근산수에 탐험하여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한 곳에서 숙식하며 평시에는 환난구제, 성곽이나 도로수축등을 자임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 공일을 위하여 일신 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다”하였다. 또한 팔관회교에는 “진흥왕 12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귀화한 혜랑을 중심으로 팔관회를 만들었는데 불교의 팔제(八齊)보다는 민간 신앙의 제천대회에 가깝고 군사적, 기무적, 수련적 기를 가진 화랑이 참석했다”고 하였다.

금강 역사상은 경주박물관에 있는 동조인 금강역사상을 보면 공격과 방어의 뚜렷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금강역사상의 주먹모양은 현재의 바른 주먹과 같고 그 밑의 손모양 역시 현재의 편주먹과 같으며 동조금강역사상을 보면 발 을 사용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어 현재의 태권도와 상당히 흡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특이 한 것은 수삽이라는 용어와 덕견이(택견이)가 같이 나타남을 보아 지금까지 체계가 불분명하던 태권이 신라로 넘어오면서 손기술과 발기 술이 분화되었다고 추축된다. 수박이란 손기술의 명칭으로 무기를 사용하는 무인이나 상류층에 치중된 기술이 검술이나 다른 무술의 기초 수련으로 실시 되었고, 일반 평민들은 몸 이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었으므로 위력이 강한 발을 중 심으로 술(術)을 발전시켰다. 이는 ‘태견’이란 말이 이두(吏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후일 이말이 탁견(托肩)이란 글자로 표기되었음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택견은 시대의 진전에 따라 발전되어 있으며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가 있다.
첫째, 언어로 볼 때 화랑은 선랑(仙郞)이라고도 했으며 선란의 ‘선’은 음이요, ‘랑’은 선인(仙人), 선배의 사람이라는 뜻을 취한 이두문으로 선배의 배와 같으며 화랑의 연원사를 선사라 함을 보아도 선랑, 화랑, 선배, 선인이 다 같은 청년 무사단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둘째, 화랑과는 선배의 조직과 상하 구분이 같다.
셋째, 신수두 경기에서 선배가 택견을 하였듯이 팔관회나 한가위 같은 모임에서 화랑이 겨룬 경이에 택견(수박, 덕견이, 택견이)이 포함되었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2세기경에는 옛부터 내려오던 투기가 택견으로 체계화되어 선배 를 무예의 기본으로 행하고, 4세기부터는 태학과 경당에서 체계적인 무예를 교육함으로써 더욱 발전하여 무용총 벽화에 나타날 정도로 일반이에게까지 보급되었다고 한다.
또, 택견은 신라에 전해져 더욱 발전하였으며 손기술과 발기술이 나누워져 조직적으로 체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대의 조각이나 불상에 있는 인물의 동장에서 손기술과 발기술이 다같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중대

고려시대의 택견

삼국시대에 기본동작, 손기술 그리고 발기술로 분화·발전된 택견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승·발전되었다. 특히 고려는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457년간 존속하면서 우리 역사상 상고시대와 근세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삼국의 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중추역할을 하였다. 이 시대는 삼국을 거친 택견이 기초 단계를 넘어서 무예적 가치를 인정받아 벼슬과 직결될 만큼 무인의 필수 무술이 되었으며 기술과 위력도 인명을 살상할 정도로 무 기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수련 형태 또한 오병수박희라 하여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집단 대련으로 발전하였다. 그 당시는 사회가 국방능력과 전투기능을 필요로 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무재(武才)만 있으면 군사로서 특별 채용될 수 있었다. 의종은 이의민 이 수박을 잘하여 대정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켰다든지, 최충헌이 손님을 초청하여 연회를 개설하고 중방의 힘센자로 하여금 수박희를 가지고 이긴자에게 교위(橋尉)나 대정의 벼슬을 었다거나 변안렬이 임견미, 염흥방 등과 수박을 하 여 이긴 결과로 밀직부사에서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함은 직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수박만 잘하면 벼슬을 얻거나 승진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며 택견의 승부로 벼슬을 주거나 진급을 시켰다함은 승부를 가리는 일정한 기준이나 규 칙이 있었음을 뜻한다고 할 때 태권의 경기화 내지 스포츠로서의 기반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수박의 위력에 관해 이의민과 두 경승이 자리를 같이 하여 서로 힘자랑을 하는데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고 두 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고 했으며, 이의민이 맨손 으로 사람의 척추를 쳐서 살해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것도 격파와 같은 단련을 통해 택견의 위력이 인명을 살상할 수 있을 정도로 무기의 수준에 달해 있음을 말해준다.

또 의종이 보현원으로 행차 도중에 오문전에 이르러 무신들로 하여금 오병수박희를 하도록 하였다하였으니 이 는 단체대련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며 그 대상이 문신과 무신인 점으로보아 대신 모두가 수박희를 할 정도로 필수 무술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왕이 거동할 때는 항상 수박희를 전문으로 개설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는 왕이 수박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군인들이 모두 수박희를 해야하며 잘하면 특진을 시킬만큼 중요시 여긴 무술 종목이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수박희는 기 술이 매우 발달하고 군사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으며 왕이 직접 관람할 만큼 스포츠적 성격을 띄었고 벼슬과 직결된 만큼 무인의 필수 무술이 되었다. 전신에서 나오는 위력도 대단하여 사람을 죽이고 벽을 뚫을 만큼 고도의 기술을 지녔고 이렇게 발전해 온 수박은 고려말에 이르러 화약이 발명되고 새로운 무기가 등장함에 따라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부재 또는 무예적인 비중이 줄어드는 반면 민속 경기로서의 기틀 을 마련하여 갔다.

신채호 선생은 송도수박이 조선까지 내려오고 있다 하였고 고려사에는 수박으로 돈이나 물건을 내기한 자는 각각 곤장이 일 백이라 하였다. 송도수박이 조선까지 내려왔다는 기록은 고려의 수도인 송도에서 민속으로 수박경기가 비롯 되었음을 말해주며 백성들이 수박으로 돈이나 물건을 내기하고 있어 이를 법적으로 규제하였다 함은 많은 백성들이 이를 민속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근대

해방전의 택견

초기에는 무예를 중시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력하였으나 화약 발명에 따른 새로운 무기의 사용도가 높아지고 군대조직이 정비되자 태권과같은 맨손 무술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유교의 이념을 국시로 삼고, 배 불 숭유의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인 행사가 폐지된 후 무예의 진흥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나라의 기틀이 잡혀 안정을 찾게 되고 군대 조직이 정비되면서 화약의 발명과 새로운 무기의 사용으로 수박희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무예도 경시되었으며 위정자들은 문치와 당쟁에 휘말리고 선비들은 무예를 무시하고 무관심하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군대를 재정비하고 창, 활, 검 등의 고대적 무기 외에 화포, 대통, 창술, 택견등 무예를 일정한 방침 밑에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는 훈련도감을 두고 5부 의장정을 뽑아 무예를 가르쳤으며 지방에는 호관 또는 속오군이란 것을 두어 군사기술을 가르쳤다.

정조때 이르러서는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무과를 두어 평수 군사훈련과 무예수련을 장려하였으며, 이덕무, 박제가 등을 시켜 무예도 보통지란 무예서를 만들었다. 이 무예도보통지 제 4권에 권법이란 이름으로 태권의 품새와 동작을 싣 고 있는데 이때 기효신서, 무편, 내가권법등 중국 서적을 참고한 관계로 중국의 용어를 그대로 빌어 쓴 단점을 가지고 있다.

무예보통지의 권법총도를 보면 다음의 순서로 진행된다.

탐마세->요란주세->현각허이세->순란주세->칠성권세->고사평세->도삽세->일삽보세->요단편세->복허세->하삽세->당두포세->기고세->고사평세->도삽세->일삽보세->요단편세->오화전신세->안시측신세,과호세->상회립,허각허이세->구류세, 안시측신세->과호세, 상호세->허각허이세,구류세->안사측신세, 과호세, 상회립->북호세,금나세->금나세, 복호세,도월->포가세->점주세->갑,을 상부

이와 같은 팀마세로부터 점주세까지 동작을 두 사람이 행하여 수련하게 되어 있다. 이를 보면 현재의 품세나 약속 겨루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동작들을 오늘날의 태권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현재의 태권도는 과학적으로 훨씬 발전된 경기이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항하기 위한 방책으로써 체육 운동이 조직화되자, 그들은 우리의 운동회나 민속놀이까지도 탄압하였다. 이때 탁견도 예외는 아니어서 금지되었으나, 사범들에 의해 비밀리에 전승 되어 내려왔다.

그 당시 탁견을 배워 민속경기에 참여한 송덕기 옹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경기방법은 동리 간에 14~5명의 선수를 선발하여 이긴 사람은 그대로 다른 사람과 계속 싸우는 식의 승발전이었다’고 하며, 이긴 동리에서는 승전의 영웅과 같은 환대와 대접을 며칠 동안이나 선수들에게 베풀었다고 한다. 송 옹에 의하면 그에게 택견을 가르친 사람은 임호(林虎)라는 사람으로 택견기술이 뛰어나 “짚단을 타고 담장을 뛰어 넘으며 수나무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 마치 날으 는 범과 같았고, 사방의 적을 양손으로 어르고 왼발 바른발로 차 넘기는 기술이 번개치듯 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용어는 다음과 같다.

·품: 서로 맞서 겨루기를 준비하는 자세
·굼실: 품이 움직이는 것
·굼실굼실: 품의 움직임이 계속되는 것
·안쭝다리: 상대의 발을 안으로 딴지 거는 것
·박장다리: 상대의 발을 밖으로 딴지 거는 것
·낚시걸이: 발목을 꼬부려서 상대의 뒤축을 걸어 넘기는 것
·무릎걸이: 유도용어에 배대뒷치리
·발등걸이: 발등으로 치기
·곧은발질: 발등으로 치기
·곁치기: 안으로 옆차기
·두 발 당상: 두발 뛰어차기
·날차리: 손잡고 몸을 돌려 재주 넘으며 발로 상대 얼굴차기
·칼잽이: 아금손으로 상대 목치기
·이마재기: 상대 이마를 장칼바닥으로 치기
·낙함: 장칼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며 미는 것
·턱걸이: 장칼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며 미는 것
·깍끔다리: 상대의 정깅이 후려차기

위의 내용으로 우리는 당시에 행해지던 민속경기로서의 동리간 택견 시합방법과 택견의 기술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품’, ‘굼실굼실’을 뺀 14개 기술 중 차기가 5개, 손기술 4개, 딴지걸고 뒤척걸어 넘기기 3개, 재주넘으며 차지 1개, 상대의 온몸 넘기기 1개로서 발기술이 제일 많고 다음은 손기술이 많으며 잡아 넘기는 기술이 그 다음이고 특이하게 재주넘으며 차는 기술까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 옛 택견의 원형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택견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일제의 주재소(파출소)에 수 차례 불려다니며 감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자연히 쇠퇴하게 되었다.

근대

해방후의 택견

해방과 더불어 민족문화와 전통에 대한 적 인식과 정리가 되어짐에 따라 옛부터 내려오던 민속경기가 되살아나기 작했다. 옛부터 ‘태껸’을 수련하던 분들이 나타났고 그 중 송덕기 같은 사람은 전 대통령인 이승만의 생일날 우리의 태권 도(태견)시범을 보여 국 태껸과 가라데의 다른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광복 이후 전문인들에 의해 태권도장이 개설되었고 그 후 6·25동란까지 초보적 발전단계를 거치다 6·25후에 시국의 안정과 더불어 점차로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점차 수련생이 늘고 도장간의 교류가 이루어지자 1954년에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고 그 후 1961년 9월 16일에는 태권도협회의 명칭을 대한태수도협회를 개칭하였다가 1965년 8월 5일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62년 6월 20일 대한체육대회의 경기단체로 대한 태권도협회가 가입승인을 받았으며 1963년 10월 24일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는 태권도가 시범종록으로 참가한 후 1964년 9월 3일 제45회 전국체육대회부터는 정식경기종목이 되었다. 그 당시 체급은 플라이(fly)급부터 헤비 급(heavy)까지 7체급의 개인전을 실시하였고 기술의 정도에 따라 중기부(1~2단)와 구기부(3단 이상)로 구분하였다.

1966년 부터는 대통경기쟁탈 전국단체대항태권도대회가 1968년 부터는 주한외국인 개인선수권대회, 1970년 부터는 전국국민학교태권도개인선수권대회와 함께 여자부 태권도개인선수권대회가 개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63년 부터 협회의 종별선수권대회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부를 1974년부터 대학태권도연맹과 국방체육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여 정식수련종목으로 선정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한 용사들이 태권도 기술을 응용, 실전에서 적을 제압함으로써 한국 군인과 태권도는 세계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발전되어 온 태권도는 점차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래에 이르러 ‘체력은 국력’이라는 정부의 국민 체력 향상 정책과 체육인구의 저변 확대에 발맞춰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태 권도 기술의 우월성은 물론 심신수련, 인격도야, 체력향상이라는 목적이 높이 평가되어 1971년에는 우리나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태권도는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군대와 경찰 뿐만 아니라 학업에 전념하는 우리의 학생들까지 실시하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국내에 200여만의 수련생과 50여만의 유단자를 배출하였고 해외에 수많은 사범을 파견하여 지도하 고 있어 민간 외교와 국위 선양에 큰 몫을 하고 있다.

1972년에는 태권도 중앙도장 겸 시합자으로서 국기원을 개원하고 1973년 5월 28일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고 회원구그이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또 1973년에는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창설하여 매 2년마다 대회를 열 고 있다. 또한 1975년에는 태권도가 미국체육회(A.A.U)과 국제경기연맹연합회(G.A.I.S.F)에 1976년에는 국제군인체육회(C.I.S.M)에서도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 1979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의 김운용총재가 세계비올림픽 종목 연합회의 회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이 IOC의 정식 승인 단체가 되는 동시에 태권도 종목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81년 미국 산타글라라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게임에서는 태권도가 9개의 메달을 획득, 한국 이 종합 2위를 획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태권도는 우리나라가 아시아 제2의 스포츠 강국이 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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